차라리 그것은 비명이었다.
내 식솔이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지켜 이은 희망이 고작 이런 사갈같은 놈들 뿐이라는 선조의 비명.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뒤엎는 노호성에 당군악은 차마 발을 내딛을 수 없었다. 아직 어린 목소리에서 내뱉기엔 지나치게 노회한 말투, 이해할 수 없는 격정과 끝맺히지 않은 서글픔과 자괴감. 피를 흠뻑 먹은 종이창은 더 이상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드르륵, 기름칠 잘 된 장지문이 열리고 피칠갑을 한 여아가 맨발을 내딛었다. 검게 물든 손 끝하며, 피가 엉겨붙은 온몸까지. 소매에 손을 넣은 제 혈족들을 바라보고선 빈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화르륵, 온 밤을 밝히는 삼매진화와 함께 온 몸과 손 끝의 독기가 가셨으니. 고작 흐트러진 궁장을 한 조카를 바라보기엔 상당히 날 선 눈빛들이 아닌가? 허나 평생 그보다 더 한 경멸을 받고 살아왔으니. 픽, 웃음기 담은 입꼬리를 말아올리고선 긴 자취를 남기며 제 처소로 향한다. 입을 다문 시비 몇이 그 발걸음을 따른다.
온 식솔이 잠에서 깨어 불을 키게 만든 소동은 그리 지나갔다, 고요하게.
"당가가 봉문 중이라는데 나중에 가도 되지 않을까?"
"지금 갈 거야."
"안 그래도 당가는 구파를 싫어하는데..."
"사형."
"오냐."
"우리가 구파야? 구파에서 내쫓긴 반푼이 도문이지?"
조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당가가 그리 생각해주겠냐는 것이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상호견제야 유구히 이어진 중원의 역사였지만, 사천당가는 유독이라 해도 좋을만치 구파일방을 '혐오'했다. 어지간한 작자들은 사천성도를 넘지 못하고 저 콧대 높은 소림마저도 선명한 명분을 들고 와 다소곳이 열흘쯤 기다리면 동항렬보다 아래 낮은 인원이 그들을 마주했다. 암존의 추혼비를 찾아 건네지 않았더라면 개방 또한 사천성도에서 영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제한된 인원에, 모든 면면을 당가에서 파악하고 있겠지만.
그러니 조걸은 청명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형제가 잠이 든 사이에 지붕에 올라 술나발을 불며 바라보는 방향은 사천의 방향이었고, 머리를 질끈 묶은 끈은 누가 보아도 선명한 녹색의 것이었으니까. 사연이 있겠지, 이 화산에 사연없는 놈이 어디 있겠나. 벅벅 머리를 긁으며 등을 돌렸다. 저는 사천 성도 상인의 자식이니 어찌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사형제들이 문제였다. 아버지께 방법이라도 강구해달라 해야지.
개방은 정확한 사천의 정보를 물어오지 못한다. 그것이 청명이 당가로 향하는 일을 서두르는 이유였다. 유독 폐쇄적인 세가라 하지만, 몇 년 전에 태어난 가주의 막내아이의 성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철저한 폐쇄가 맞았다. 아마도 하오문에 묻는다면 정확한 답을 알 수 있겠지만 상당히 거금을 들여야 했고, 그 치들은 본래 신뢰조차 없으면 제대로 거래를 해주지 않았으니. 전생의 그가 하오문에 들락거렸던 일도 당보의 신뢰를 빌려 멱리를 쓰고 불가피하게 출입했던 일 뿐이었다. 당가의 봉문 또한 그렇다. 대외적인 이유로 내부 정리를 들었으니, 정말로 내부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난 게 분명했다.
안 좋은 쪽으로 일어난 거라면 도와주고, 만일... 나와 같이 네가 돌아온 여파라면. 나는 수천일 만에 너를 다시 볼 수 있을테니.
"청명아! 채비는 다 마쳤느냐!"
"어, 짐 다 쌌어! 지금 출발하게?"
풀쩍. 낡은 검을 옆구리에 끼고 뛰어내려 휘적휘적 걸음을 옮긴다. 궁상 떤다 탓하지 마라, 이놈아. 그러게 누가 먼저 지아비를 두고 가랬나.
"왜 다 안 썼어요?"
"도장?"
빈 병을 돌려받은 청명이 제 사형제들의 자리를 휘익 둘러보곤 고개를 숙였다. 소매를 정리하던 당잔이 고개를 기울이자, 흘러나오는 투가 은근하였다. 허나 재촉하는 바 없이, 그들의 선조처럼.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고작 멀리서 비도를 던지는 것? 독공을 활용하는 것? 청명은 당가의 저력이 고작 그것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당잔의 체격을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파악하기는 충분했고. 하체가 탄탄히 잡혀 있고 몸의 균형이 바르다. 흔히들 비도를 사용할 때 쓰지 않는 부위까지 꼼꼼히 근육이 붙어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면 단지 비도술만을 익힌 건 아닐텐데.
"사문에서 배운 것만을 가지고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청명에 대한 호감이 미약하게 섞인 투에선 많은 여지가 남아있었다. 청명이, 당잔의 형제들 뒤에 선 멱리를 쓴 작은 인영을 바라보자 당잔은 가만 눈썹을 까딱였다. 당신이 짐작하는 바가 맞다는 뜻이다.
"아쉽지 않더냐. 쌓인 내력도 제법 방대하고, 무재도 있어보이고."
"저가 선택한 길인데, 제가 왜요?"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는 거 같길래."
"옛날 생각 잠깐 한 거요."
"무슨 생각?"
"내 형제자매들 중에 한명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하다못해 나를 이해해줬다면. 하는 생각?"
독왕 당철악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낸 것이 당보였다고 했나, 소문이지만 거의 확실하다는 이야기를 청진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 청명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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